사랑하는 아들에게- 로 시작하는 내용의 편지가 다섯 장. 사랑하는 아내에게-로 시작하는 편지가 두 장.
그렇게 아버지는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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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아버지는 슈퍼맨이었다. 걸걸하고 시원시원한 성격하며, 자존심 강하고 매사에 자신감 가득한, 때로는 가족에게 해가 될 때도 많았지만 그런 아버지가 좋았다. 당신께 효도는 가끔 만나 맞담배나 피고 소주나 한잔 하는 것이라며, 만나서 술을 먹을 때마다 담배가 두어곽, 술이 한 짝. 코가 비뚤어질때까지 먹곤 했다. 고등학교 때 내가 담배를 핀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그토록 기뻐하며 내 방에 재떨이를 놓아주셨던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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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어렸을 적 할아버지께서 병환으로 거동이 불편해 방 안에서만 수년을 지내시다 가신 것.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두어달 정도 치매를 앓고 어린아이가 되셨던 게 못내 마음에 남으셨는갑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나를 앉혀놓고 '가족에게 부담이 될 거라 느껴진다면 나 스스로 갈 터이니 너무 슬퍼 말거라. 그때는 네가 가장이다. 어머니 잘 챙겨라'는 말을 하셨다. 보통 만날 때마다 같은 소리를 하셨으니 수백번도 넘게 들었을 걸. 언젠가 아버지가 긴 여행을 훌쩍 떠날거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그래도 올해 아이가 태어나면서 최소한 손주녀석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텨보시라 부탁드렸고, '노력해볼게'라는 답을 들었다. 괜찮을 줄 알았다. 잠시 두어 달 마음을 놓았다. 아버지 표정도 좋았고, 무엇보다 마음이 한결 편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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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아버지가 사라졌다. 지방에 있는 친구 병문안을 가시겠다고 말씀을 하시고는 '건강하라'고 하셨다. 부랴부랴 다시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다음 주 저녁 약속을 잡았다. 걱정한 것보다 목소리가 편안해 괜찮을 줄 알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핸드폰을 꺼두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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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도 핸드폰을 꺼두시는 분이 아니시기에, 이틀 째가 되던 날, 다른 어머니와 와이프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불안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음날 경찰서에 갈 요량으로 연차를 내고 퇴근하던 중 경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 핸드폰으로 경찰이 전화를 걸었다. 00동 사거리에 있는 모텔로 와주셔야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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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없이 떨고 있는 어머니를 아래층에 두고, 혼자 올라가 아버지를 확인했다. 평소 그리하듯이 속옷만 입은 채 편안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20년째 불면증을 앓아온 아버지가 야금야금 챙겨두었을 졸피뎀이, 한 알만 덩그러니 남아 침대 옆 커피 테이블에 신체기증각서와 놓여져 있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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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들어 아버지 성격이 괴팍해졌다는 생각은 들었다. 약주 드시고 실수하는 일이 잦아졌고, 평소보다 화를 더 잘 내시거나, 그냥 웃어넘겼을 일에도 죽자고 덤벼드는 일이 많았다. 계속되는 사업실패에, 이룬 것 없이 늙어간다는 답답함에, 가족들에게 짐이 된다는 걱정에, 예민해진 신경 탓이리라 생각했다. 10년 전 아버지를 일찍 데려갈 뻔 했던 교통사고 후유증도 그렇다. 목욕탕에서 '아프시우?'라고 넌지시 물어볼 때면 '괜찮다. 너나 신경써라'고 덤덤하게 말했는데. 최근 아버지 문자이력을 보니 정형외과에 열심히 다녔구나 싶다.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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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께서는 치매증상이 심해졌다고 느끼셨나보다. 교통사고로 다친 부위도 참을 수 없이 아팠고, 불면증도 지긋지긋하다고 쓰셨다. 손주도 보시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내미가 회사에서 나름 인정받고 이제 좀 살만하다 싶으셨으니 마음에 걸릴 게 없으셨나보다. 혹시나 목을 메거나 손목을 긋거나, 다른 끔찍한 방법으로 생을 마감하면 남겨진 자식새끼랑 끔찍히 위했던 어머니가 충격받을까봐 수면제를 택하고, 이미 모든 뒷정리를 끝내신 후였다. 여러 장의 유서에 적힌 날짜는 지난해부터 시작되었다. 아. 임신소식을 듣고 일년 더 계시다 가셨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주녀석 보시려고 아픈 몸을 이끌고 일년을 더 버티셨던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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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아버지 사진을 찍으면서, 웃는 사진이 거의 없었다. 지난 주 우리집에 놀러오셔서 손주녀석 안고 계신 사진을 찍었는데 왠일로 활짝 웃으시더니, 그게 영정사진이 될 줄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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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도 나와 어머니는 생각보다 괜찮다. 어느정도 예상했었던,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도 했고. 어렸을 때부터 마음의 준비하라는 조기교육을 받아서 그런가, 조서를 받아적던 형사가 의아해할 정도로 침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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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핸드폰 전화번호를 싹 정리하는 바람에 친구분들 연락드리는 데에 애를 먹었다. 다행히도 많은 분들이 와주셨고, 내 친구놈들도 생각보다 많이 와 자리를 지켜주었다. 장을 치루는 마지막 날까지 눌러 앉아 빈소에 있던 술과 안주를 모조리 먹어치우고, 새벽 서너시까지 왁자지껄 웃고 울고 떠들어댔다. 아버지 보시기에 꽤나 흡족하셨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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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인하는 아침, 제일 먼저 혼자 일어나 아버지께 술 한잔 올리고. 담배 한대 물려드리고, 나도 한대 물고 영정사진 앞에 앉았는데, 눈물이 왈칵 터져서는 한참을 울었다. 아버지 보내드리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흘린 눈물이다. 만약 당신께서 가셔도 울지 말라고 하셨거든.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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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보내드린지 이제 사나흘 되었는데 원망스러운 것도 없고, 아쉬운 것도 많지 않다. 자꾸 생각나는 게 있다면, 손주녀석이랑 목욕탕 한 번 가셨으면 어땠을까. 그때까지 기다리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과, 아버지 목소리가 담긴 동영상을 촬영해놓을 걸. 하는 생각. 다행히도 지난해에 사랑한다 말씀해드렸고, 낳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건넸기에. 그 외에 딱히 아쉬운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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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와서는 전한다는 이야기가 아버지 부고소식이라 미안합니다. 나는 나름 아버지 잘 챙긴다고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네요. 횽들이 알아서 부모님 잘 챙기시리라 믿지만,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 계속 묻어두지만 마시고 꼭 부모님께 전해주세요. 그리고, 목소리 담긴 동영상이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벌써부터 아버지 목소리가 잘 기억이 안 나요. (내 목소리가 아버지 목소리랑 99% 같다고들 하시지만) 그게 참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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