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박씨는 그 기원이 오래되다보니 분파가 상당히 많다. 개중에는 아예 본관을 따로 만들어 나간 태안박씨, 나주박씨, 창원박씨 등도 있지만 그대로 밀양박씨에 남은 사람들은 태사공파, 은산공파, 규정공파 등으로 나누어 종친회를 구성하고 족보를 관리한다.
그래서 나는 밀양박씨 무슨 파인가 하니...
졸당파.
아니 다른 데는 파 이름 멋있던데 왜 우리 집안은 저따구지? 혹시나 해서 한자를 찾아봤는데 진짜 옹졸할 졸(拙) 자를 쓰는 졸당파였다. 게다가 졸당공 할배는 4형제였는데 각각 호가 우당, 인당, 아당, 졸당으로 둘째인 인당의 참을 인(忍)을 빼고는 모두 근심 우(憂), 벙어리 아(啞)로 좋지 않은 뜻이었다. 왜 이런 이름을 짓게 되었을까 궁금해서 여러 사이트를 돌아다녀 보았다.
이 네 명은 아버지 송은 박익(1332-1398) 할배의 소개로 친구인 포은 정몽주(1337-1392)의 제자로 들어갔으며 4주수라고 불리며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네 형제모두 고려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역성혁명이 일어나 조선이 건국되었다. 거기에 스승은 이방원에게 죽고 말았으니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이에 형제들은 맹자의 글 이루 (離婁) 하편의 내용을 생각했다. 대충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자가 보통 사람과 다른 까닭은 내키는 대로 살지 않으며 자신을 살펴 항상 인이 아니면 하지 않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맹자는 군자는 잠시잠깐의 근심이 아닌 일생을 지니고 살 근심이 있다면서 군자유종신지우 (君子有終身之憂)라는 말을 썼는데 이 글에서 첫째아들 융(融)이 아이디어를 얻은 모양이다. 어떤 이는 이성계가 이런 마음이 없다는 것을 훈계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쓴 것도 봤는데...그건 알 수가 없는 일.
아무튼 그래서 첫째아들은 '고려를 위해 할 일이 무엇인지 걱정하는 마음' 이라는 뜻으로 우당, 둘째는 '고려를 위해 어떠한 고난도 참는 마음'이라는 뜻으로 인당, 셋째는 '고려를 위해 종묘사직을 찬탈한 역적과 말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뜻으로 아당, 마지막으로 넷째는 '고려를 위한다면 졸렬한 마음으로 권세를 누리고자 하면 안된다는 마음'으로 졸당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아들들이 지은 호가 맘에 들었는지, 아버지는 아래 에피소드에서 아들들의 호를 가지고 말을 만들어낸다.
대놓고 조선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뒤, 박씨 일가는 온 가족이 짐을 싸들고 낙향해버리고 만다.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는 1395년 공조판서 자리를 주면서 스카웃을 하려 했지만 박익 할배는 2차례에 걸쳐 거절했고, 세번째는 삼조판서(형조+예조+이조) 벼슬자리를 두 차례 제의 했으나 또 거절했다.
마지막 다섯번째 등용 권고는 특별히 대사헌 권근(1352-1409)이 직접 내려갔는데, 권근 또한 4형제와 함께 정몽주 밑에서 공부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는 거절에 대해서는 이해하겠지만 정히 그렇다면 아들들이라도 관직에 제수시키면 안되겠냐는 제안을 내놓았다. 이에 박익 할배는
"첫째 융(融)은 호가 우당(憂堂)인데 집안에서 불미스러운 일과 근심거리만 만드는 놈이라 조선에 걱정거리만 끼칠 불충한 신하가 될 것이다."
"둘째 소(召)는 인당(忍堂)인데 성격이 불 같고 참을성이 모자라 언젠가는 조선에 화를 부를 것이다."
"셋째 조(調)의 호는 아당(啞堂)이라 함은 말 못하는 벙어리 같아 나라에서 벼슬을 내려봤자 나랏님이 백성의 웃음거리가 된다."
"넷째 총(聰)은 졸당(拙堂)인데 얘는 모든 일처리가 졸렬하고 한심스러우니 나라에 쓸모가 없는 자식뿐이다."
거의 뭐 이 정도면 태조더러 죽여달라는 소린데, 이성계 또한 찔리는 구석이 있다 보니 반역죄를 묻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밀양박씨에는 우당파, 인당파, 아당파, 졸당파가 생기게 되었고, 이 중 첫째와 셋째 아들은 아버지 사후 벼슬길에 나아갔지만 둘째와 넷째는 그대로 시골에 쳐박혀 살았다고 한다.
조상님 걍 벼슬 좀 더 하시지...규정공파 봐요 얼마나 잘나가는데. 이름이 구리면 딴 거라도 좀 제공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