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이야기는 용두사미에 가깝습니다.
1940년대 초 당시 일제는 모든 물자를 끌어다 전쟁에 쏟아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당연히 식민지인 조선의 인적 자원도 포함되었지요. 경기도 양주 남부의 한 시골 마을에서도 강제 징용이라는 말이 낯선 단어는 아니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동네의 젊은이들은 줄어만 갔고, 사람들은 어떻게든 고향을 떠나지 않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청년 한씨는 농사보다는 돌아다니는 기질이 있었는지 경기도와 서울을 오가며 물건을 떼어다 파는 등의 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끌려가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돌아올 수 없는 징용생활을 하기는 싫었고, 동네가 청주 한씨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보니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조선인 면서기 또한 일단 한씨라면 그럭저럭 봐 주는 편이었습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던 일본은 더욱 수탈과 징용, 징병을 통해 전시물자를 확보하는데 열을 올렸고, 결국 면서기는 한씨에게도 징용을 가야만 한다고 전합니다. 여전히 고향을 떠나는 것은 싫었지만, 면서기가 그를 좋게 보았는지 지금 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귀띰해주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번이 아마도 국내로 징용가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며 이후로는 한반도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게 된다는 겁니다. 한씨는 해외로 나가는 것 보다는 그래도 조선 땅에서 남아 있는 편이 돌아올 희망을 가질 수 있겠다 싶어 마지못해 이번 징용행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렇게 한씨는 경기도에서 함경도로 징용길에 오르게 됩니다.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로 일어선 신흥재벌 노구치 콘체른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함께 회사를 키워 나갔습니다. 노구치 재벌은 1927년 조선 반도에서 질소비료 공장을 돌리기 위한 최적의 장소로 흥남지역을 선택했습니다. 태백산맥을 이용해 거대한 수력발전소를 세워 막대한 전력소모량을 충당하고 각지의 화물을 받아들이고 보내기 위해 여러 노선의 사철(私鐵))을 연결했으며 동해안을 통해 물자를 일본으로 운송하는 식이었죠. 질소비료를 만드는 공장은 전쟁이 일어나면 화약의 생산공장으로 전환되기에 전시에 일손이 많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흥남에 세워진 것이 당시 아시아 최대, 세계에서 두번째로 컸으며 현재도 북한 최대의 비료 생산지인 흥남 비료 공장이었습니다.
흥남 비료 공장의 임원과 숙련 기술자는 전부 일본인이었으며 식민지의 조선인은 단순노동과 잡일을 할 뿐이었습니다. 물자가 부족하니 당연히 노동자들에게 나오는 식사는 부실했으며 공간도 부족해 한 방에 열몇명씩 들어가 뒤엉켜 자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었을까요? 최대한 징용을 미루고 미루던 끝에 왔더니 일본의 전쟁은 이미 패색이 짙어가는 상황이었고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이 조선인 뿐만 아니라 강제동원된 노동자들을 감시할 일본인 또한 부족해진 상황이었습니다. 이렇다보니 어떤 날에는 한 방에 살던 사람들 전체가 도망쳐 달아나는 사건이 일어날 지경이었습니다. 사람이 줄면 남아있는 사람들이 더 힘든 것은 뻔한 일입니다. 한씨는 이에 같은 방을 쓰는 이들에게 우리도 이 곳을 탈출하자고 말합니다. 한 사람이 한씨에게 물었습니다.
"탈출이야 하고는 싶은데 집까지 어떻게 가게?"
"어떻게 가긴 기차 타고 가야지."
뻔뻔할 정도의 대답이긴 하지만 정답이기도 했습니다. 흥남비료공장까지 들어오는 사철은 흥남역과도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며칠 후, 그들은 날이 갈수록 허술해져 가는 감시망을 뚫고 공장단지를 수월하게 탈출했습니다. 공장을 나서는 건 싱거울 정도로 쉬웠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흥남역까지는 비교적 어렵지 않게 도착한 그들이었지만, 거기서 순사들이 함흥역에서 기차를 수색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입니다. 흥남역 다음은 함흥본궁(이성계 말년에 살던 곳. 사후 사당으로 사용됨), 그 다음이 함흥역입니다. 흥남 비료 공장에서 탈출한 이들이 함흥역에 가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이야기대로라면 함흥에는 순사가 있을 것이 당연합니다. 어떻게 움직이면 좋을 지 고민하던 끝에 한씨는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함흥에 가서 잡힌다면 함흥을 안 가면 된다."
그래서 그들은 본궁에서 내려 함흥역을 지나쳐 철길을 따라 도보로 원산까지 걸어갑니다.
그렇게 근성으로 원산에 도착한 이들은 각자 고향으로 떠나기 위해 헤어졌고, 한씨는 거기서 잡일을 하며 차비를 벌어 청량리까지 돌아오는 데 성공해 무사히 집에 돌아왔고 얼마 안 있어 광복을 맞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 후 이어지는 한국전쟁 등 고생을 겪고 난 뒤에도 한량 기질이 여전했던 한씨는 일을 하는 대신 전쟁 이후 부실해진 가문의 족보를 다듬기 위해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을 사실상 큰아들에게 맡긴 채 이곳 저곳을 다니며 족보에 올릴 내용을 수집해 정리했고 그것을 일생의 자랑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어째서 알고 있냐구요? 제가 외손자라서 외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인터뷰한 기록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