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8월 11일 토요일) 오후 7시반부터 콘서트가 있었다. 1부는 프랑스 가곡, 2부는 다음주에 있을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프리뷰였는데, 나는 프리뷰 공연에서 주인공 알프레도 역을 맡아서 하게 됐다. 아래 내용은 토요일 하루, 그 중에서도 공연 시간에 초점을 맞춘 의식의 흐름을 기록한 것이다.
8월 초부터 계속 연습을 하고 있으면서 본업은 코러스, 그리고 주연 캐릭터가 아플 때를 대신해 준비시켜 두는 커버 역할이라 설렁설렁 곡을 외우고 있다가 당장 일주일 앞으로 공연날이 닥치자 정신없이 프리뷰 때 하는 부분을 기를 쓰고 외워댔다. 당일 오전까지는 곡을 제대로 외웠고 연기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만 정신이 팔려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후 4시 반쯤에는 이른 저녁을 먹어두자고 생각하고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span style="letter-spacing: 0px;">오후 6시 콜타임에 도착해야 하고 내가 나오는 공연은 오후 8시 20분쯤 시작하게 될 테니 타이밍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span><span style="letter-spacing: 0px;">살짝 속이 더부룩해서 걱정이 됐다. 졸릴까봐 커피도 마셨더니 더 더부룩해졌다.</span>
갈아입을 연주용 의상을 준비하고 목욕재계를 한 뒤, 약 5시 반 경에 집을 나섰다. 아직도 머릿속에 서너군데 기억이 빈 부분이 있어서 주머니 속에는 가사를 쓴 메모지가 들어 있는 상태.
쇼케이스 장소에 도착해서 동료들을 만났다. 나와 함께 여주인공 역할을 하는 친구는 줄리아 테일러라는 소프라노인데 올해 막 대학원을 졸업했고 조금은 자의식이 넘쳐서 그저께는 나 보고 "연주 때 만큼은 날 좋아하는 척 해야 돼"라고 하더라. 내가 무대에 서면 완전 캐릭터에 몰입하는 걸 몰라서 그러는 소리지. 아무튼 그러던 애가 아직 머릿속에서 이탈리아어 가사들이 정리가 안 되는지 긴장해서 토할 것 같다고 말하는 게 안쓰러웠다. 그러는 나도 아직 더 검토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나도 긴장되는데 무대 위에 올라가서 둘이 같이 토하면 재밌겠다"라는 실없는 소리를 했다.
여기 디렉터는 되게 정리가 안 되는 타입의 인간이라 리허설을 날림으로 대충 하고 디테일한 연기는 가수들 보고 알아서 하라고 시킨다. 아직 좀 더 연습 시간이 필요한 학부생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7시까지 정말 노래 한번 제대로 안하고 리허설을 마쳤다.
대기실로 들어가 있으나 줄리아가 자기랑 듀엣하는 부분을 맞춰보자고 했다. 너무 긴장하는 것 같아서 내 솔로파트는 빨리감기 하듯이 스르륵 지나보내고 걔가 하는 걸 봐줬다. 아무래도 영어가 서툰 사람이 상대 배역이다보니 자기가 리드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자기가 더 못 외운 부분이 많으니까 더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7시 30분에 공연 1부 출연진이 대기실을 나갔다. 이제 내 파트를 다시 외워보는데 그제서야 확 긴장이 몰려오면서 무대공포증이 오려는 감각이 들었다. 한없이 꺼지면서 나는 역시 무대에 서는 것 보다는 가르치는게 체질인 것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지금와서 그만둘 수도 없는데 일단은 해야지...하는 마음으로 형광펜으로 칠해놓은 내 악보를 노려보았다.
1부가 끝나고 인터미션 중에 음료와 간식거리가 관객들에게 제공되었다. 살짝 로비로 나가서 음식은 먹지 않고 물만 두 잔 마셨다. 줄리아는 도저히 안되겠는지 와인 한 잔만 마실 수 없겠냐고 하길래 잔을 가져다 줬더니 상태가 나아졌다.
아무래도 먹거리가 있다보니 인터미션이 길어져서 약 8시 40분경에 2부 공연인 오페라 프리뷰가 진행됐다. 항상 그랬듯이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는 머릿속에서 악보들이 마구 뒤엉키면서 과연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온다.
반주가 시작되고, 먼저 여주인공인 줄리아가 노래를 시작한다. 나는 뒤이어서 등장해야 하는데 첫 가사 두 개가 자꾸 머릿속에서 순서를 바꿔댄다. 항상 생기는 일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뇌가 아닌 몸이 기억할 것을 믿고 첫 가사만 생각하고 무대로 나간다. 그리고 연주는 하나도 잘못된 부분 없이 부드럽게 진행된다.
<span style="letter-spacing: 0px;"> 예전에 학부 때 교수님이 그런 얘기를 했었지. "니네 학기말 실기시험 보기 전까지 같은 노래 천번은 부르냐?"라고. 나 같은 타입은 생각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표현을 잘 하기 위해서는 몸에서 자동으로 나올 때 까지 반복을 해야 한다. 그래야 생각에 여유가 생겨서 비로소 음악을 만들 수 있다. 이번에는 너무 여유 없이 준비를 했기 때문에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창피를 당할 상황이 오지 않아 한숨을 돌렸다.</span>
<span style="letter-spacing: 0px;"> 다음 장면에서는 여주인공만 나오고 나는 무대 밖에서 노래를 하는 설정이므로 쉬어가면서 부를 수 있었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여주인공의 비중이 거의 반이고 다른 배역들이 나머지를 채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3막짜리 오페라 중 1막의 중요 내용이 끝났다.</span>
<span style="letter-spacing: 0px;"> 2막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디렉터가 나온다. 2막은 바로 남주인공의 등장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나는 디렉터가 설명을 마치자마자 뛰어나올 준비를 한다. </span>
<span style="letter-spacing: 0px;">사실 이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한 테너의 아리아다보니 평소에 이미 외워놓은 덕분에 무난하게 할 수 있었다. 남은 건 좋은 소리와 함께 연기로 내용을 전달하는 것 뿐. 조금 흥분한 탓에 발성이 살짝 흔들린 적이 있었지만 큰 실수는 없었다. 겉으로는 활짝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아쉬운 생각이 몰려온다.</span>
<span style="letter-spacing: 0px;"> 그 뒤 남주인공과 아버지가 같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디렉터가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에 내 맘대로 했다.</span>
<span style="letter-spacing: 0px;">여기서는 지금 주연을 맡고 있는 애를 보면서 답답했던 부분을 '나라면 이렇게 했겠다'하는 식으로 어레인지 해 봤는데 실제로 해 보니 생각보다는 별로였다.</span>
2막의 피날레에서 남주인공이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이 있다.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나는 그냥 오페라 가수라기보다는 샤우팅에 가깝게 소리를 질렀는데, 그 배역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서 택한 방법이지만 목이 약하다보니 3막 들어가기 전에 목이 슬슬 갈라지려는 느낌이 들었다.
3막에서 길고 긴 여주인공의 아리아를 들으며 뒤편에서 마지막으로 가사를 체크해본다.
듀엣 부분을 아까 연습할 때 줄리아가 가사를 까먹어서 걱정이었는데 이 듀엣은 서로 끌어안은 상태에서 내가 먼저 앞부분을 부르면 거의 똑같은 가사를 여주인공이 반복하게 되기 때문에 잘 들으라고 귓가에 또박또박 들려준다.
근데 역시나...얘가 가사를 까먹어버렸다. 그래도 곡 안에서 다른 가사를 반복해 어찌어찌 넘어갔는데 긴장했는지 잡은 손 안에서 박자를 세고 있다. 뭐 어때. 음악을 끊어먹지 않으면 됐지.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이 회광반조를 띄다가 덜컥 죽는 부분이다. 여기까지 오니까 이제 마음이 좀 놓인다.
여주인공의 단말마를 들으면서 쓰러진 여주를 부여잡고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떨구면 관객들은 내 얼굴을 못 보지. 속으로는 '아 이걸로 끝났구나. 살았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완전히 음악이 끝나고 나면 일어서서 인사할 궁리를 한다.
끝나면 미국인 청중들은 와서 자기 나름대로 인사와 감상평을 말해준다. 긴장이 풀리니까 평소보다 영어가 잘 나오는 것 같다. 어느 노부부가 좋게 말씀을 해 주시길래 다음주 목요일에 있는 콘서트에도 와 달라고 청했다.
이제 다음주에는 또 다른 오페라 명장면 콘서트와 라 트라비아타 오페라 본 공연이 남았지만, 내가 출연하는 공연 중에 가장 부담이 큰 게 이 콘서트였기 때문에 속이 개운해졌다. 이제 아직 입 안에 맴도는 코러스 파트를 다시 제대로 외울 차례다. 오늘 이후로 남주인공 파트는 머릿속에서 삭제를 하고 싶은데 주연 녀석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또 외우는 거 귀찮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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